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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바다
지켜온 소청 등대
117년동안 주민 삶과 얽힌 기억의 공간
2025년 9월 4일 오전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거센 파도가 절벽에 세차게 부딪쳤다.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산림이 검푸르게 보여
‘청도(靑島)’,
즉 푸른 섬이라 불리는
소청도
.
그 섬의 서쪽 끝,
해발 83m 해안 절벽
위에
하얀 등대 하나가 묵묵히 서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유인 등대,
소청도 등대
다.
1908년 1월 1일
일제강점기 당시 첫 불을 밝힌 이 등대는
올해로
117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서해를 비추고 있다.
바다에서 약 42㎞ 떨어진 거리에서도
불빛이 보일 만큼 밝게 빛난다.
등대 전망대에 올라서니
서해의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발 아래로 펼쳐진 바위와 절벽은
마치
거북이 등 위에 올라선 듯한 풍경
을 연출했다.
박준복(67) 소청도 이장 겸 지질공원 해설사
“아버지, 할아버지 때만 해도
나침반 하나
만 들고 바다에 나가셨어요.
지금이야 배마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
(GPS) 같은 장비가 있지만
예전에는 이 등대 불빛이 깜깜한 밤바다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잡이자 그야말로 목숨줄
이었죠.”
이곳은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 등대
이자
중국 산둥반도와 만주 대련 지방으로
향하는 선박들의 핵심 항로에 놓여 있다.
바다 건너편으로는
북한 옹진반도 장산곶
이 훤히 보인다.
소청등대가 이 자리에 세워진 것도
이런
지리적 특성
과 연관이 있다.
당시 대청도의
선진포구
에는
일본 포경선단
이
머물렀고, 이들이
산둥반도까지
고래잡이를
다녀오는
항로를 비추기 위해
등대가 설치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소청도 등대
는 단순히 항로를 안내하는 역할을
넘어 오랜 세월 주민들의
기억과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등대를 둘러보던 박 이장은
조심스럽게
옛날이야기
를 꺼냈다.
“
1960년~1970년대
소청도에는 ‘
금주령
’이 있었어요. 술을 담그거나 마시는 게 금지돼 있었죠.
가택 수색도 당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등대 절벽 근처에 술을 숨기곤
했어요.
밤엔 ‘
등대 놀러 간다
’고 핑계 대고 올라가서 술을 마셨다고 하더라고요.”
문제는 그 길이 지금처럼 잘 정리된 탐방로가 아니라
‘낭길’이라 불린 절벽 길
이었다는 점이다.
“거기서 굴러떨어져
목숨을 잃은
어르신들도 있고,
다행히
살아남은
분도 있어요. 그중
한 분은 지금도 소청도에 살고 계세요
.
등대는 섬 주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쌓여있는 곳이에요.”
최근
해양수산부
에서 추진하는
‘이달의 등대’
정책 덕분에 소청도를 찾는 관광객들도 조금씩 늘고 있다.
전국의 등대를 순례
하며 마지막 코스로 이곳을 찾는 방문객도 적지 않다.
“관광객들이 등대에서
풍광을 보면 다들 놀라세요.
여기만큼 경치 좋은 곳이 없다고 하거든요.”
박 이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만
접근성 문제
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섬에는 버스나 택시 같은
교통수단이 없어
선착장에서 등대까지 7.3㎞를 오로지
도보로 이동
해야 한다.
또 등대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등대 아래에서 올려다봐야
하는데
그 방향으로 연결되는
탐방로는 아직
조성돼 있지 않다.
“
정부나 인천시가 예산을 지원
해 주면 등대 아래에서
조망할 수 있는
스카이워크
같은 탐방로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더 많은
관광객분들이
이 아름다운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겁니다
.”
< 섬, 하다 >
< 섬, 하다 >는 인천 바다 끝에 사는 섬 주민들 이야기다.
대청도와 소청도에서 10억 년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서풍받이와 나이테바위, 모래가 만든 해안사구, 117년간 불을 밝혀 온 소청등대까지 섬의 삶과 변화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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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