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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4일 오전 인천 옹진군 소청도 예동마을 ‘당산(堂山)’ 중턱
마을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하얀 동상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사각형 콘크리트 기단 위에 세워진 이 동상은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생애를 새긴 조형물이다.

1960년대 초 이 동상이 세워질 당시만 해도 소청도에는 공소(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성당) 조차 없었어요. 
그런데 왜 굳이 이 섬에 세운 걸까요. 백령도도 있고, 대청도도 있는데 말이죠.”



박준복(67) 소청도 이장 겸 지질공원 해설사는 
동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이같이 말했다. 
그가 주목한 건 동상에 적힌 한 문장이었다.

‘1846년 4월 18일 중국과 연락차 연평도 경유, 소대청을 거쳐 백령도 근해서 중국 어선에 송신했다.’

박 이장은 이 문장에서 ‘거쳐’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김대건 신부가 소청도에 실제 상륙했는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거쳐’라는 표현이 단순히 해상을 지났다는 뜻이 아니라 직접 발을 디뎠다는 뜻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동상이 이곳에 세워졌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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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동상은 1960년대 초반 소청도에 공소가 세워지기 몇 해 전부터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박 이장은 당시 신자가 거의 없던 외딴 섬에 
동상이 먼저 세워졌다는 점에서 소청도가 단순한 경유지가 아닌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였다고 해석했다.

이 동상을 세운 이는 미국 출신 천주교 선교사 에드워드 모펫(한국명 부영발, 1922~1985년) 신부다. 1959년 백령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며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그는 이후 소청도와 대청도를 오가며 천주교 전파에 힘썼다.
그 배경에는 박해와 고립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던 
조선 천주교의 현실이 있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을 중국 베이징 교구에서 분리해 ‘조선대목구’라는 독립 선교 구역을 설치했다. 
당시 조선은 신자 수가 적고 사제가 부족한 선교지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가 이 지역을 맡아 
사목 활동을 하게 됐다.

1836~1837년 사이 프랑스 선교사 샤스탕, 모방, 앵베르 등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에 몰래 입국했지만 
1839년 기해박해로 모두 순교했다. 
이 사건 이후 조선에서 육로 입국은 사실상 봉쇄됐다.

7년 후인 1846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신부는 
김대건 신부에게 바닷길을 통한 입국 경로 개척을 지시했다.





이 여정을 기억하기 위해 소청도에는 
김대건 신부의 흔적을 기리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에만 세 차례에 걸쳐 250명의 순례객이 소청도를 찾았고, 올해 90여 명이 다녀갔다.

“김대건 신부의 이야기가 깃든 소청도가 앞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성지순례 코스로 알려지길 바랍니다. 자연과 역사, 신앙이 어우러진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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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 하다 >

< 섬, 하다 >는 인천 바다 끝에 사는 섬 주민들 이야기다.

대청도와 소청도에서 10억 년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서풍받이와 나이테바위, 모래가 만든 해안사구, 117년간 불을 밝혀 온 소청등대까지 섬의 삶과 변화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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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라 기자